결호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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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결호 작전은 1945년 일본 본토 결전을 위해 일본군이 준비한 작전으로, 필리핀 전역에서의 패배와 독일의 항복으로 악화된 전황 속에서 연합군의 본토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수립되었다. 일본은 쿠릴 열도, 오키나와, 대만 등에서 저항하여 시간을 벌고 본토에서 결전을 치르는 점감요격전략을 채택했으며, 육해군의 지휘 체계 재편과 대규모 병력 동원을 통해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육군은 53개 사단, 22개 혼성 독립 여단 등을, 해군은 자살 특공 무기를 포함한 전력을 준비했으며, 국민의용전투대까지 동원될 예정이었다. 작전은 쿠릴 열도, 관동, 규슈 방면을 중심으로 준비되었으며, 해상, 해중, 공중 공격을 통해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수제 결전 전술을 통해 본토 방어를 시도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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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호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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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호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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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전투 | 결호 작전 |
전역 | 일본 본토의 전투 |
시기 | 1945년 11월 (예정) |
장소 | 일본 본토 및 주변 도서, 해역 |
결과 |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 중지 |
교전 세력 | |
교전 1 | 추축국 측 |
교전 2 | 연합국 측 |
지휘관 | |
지휘관 1 | 쇼와 천황 |
지휘관 2 | 스즈키 간타로 |
지휘관 3 | 해리 S. 트루먼 |
지휘관 4 | 클레멘트 애틀리 |
병력 규모 | |
병력 규모 1 | 30,000,000명 이상 |
부대 1 | 제1총군 (동일본) 제2총군 (서일본) 제5방면군 (홋카이도) 관동군 (만주) 해군총대 항공총군 특설경비대 국민의용대 |
병력 규모 2 | 1,500,000명 이상 |
부대 2 | 전함 24척 이상 항공모함 60척 이상 구축함 450척 이상 보조 함정 3,500척 이상 항공기 6,000기 이상 |
피해 규모 | |
피해 규모 1 | 중단으로 인해 없음 |
피해 규모 2 | 중단으로 인해 없음 |
2. 배경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은 패배하였고, 1945년 1월 9일 미군이 루손 링가옌만에 상륙하면서 일본 본토 침공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일본군은 말레이반도, 인도차이나반도, 남양 군도, 중국 남부, 만주국 등에서 제해권과 제공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연합군 해군의 잠수함과 함재기의 공격으로 수송선과 호위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만 전투 이후,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타이완섬에 이르는 제해권과 제공권을 상실했고, 연합군의 징검다리 작전으로 보급선이 차단되어 물자 수송과 병력 증원이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동맹국인 나치 독일마저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소련의 대일 참전 또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대본영은 1945년 1월 20일, "제국육해군 작전계획대강"을 결정하고 본토 결전 준비에 돌입했다.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이 패배하면서, 쿠릴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난세이 제도 이남의 오키나와, 대만 등에서 연합군에게 최대한 저항하여 시간을 벌고, 그동안 일본 본토에서 결전을 치른다는 점감요격전략이 채택되었다.
일본군은 연합군의 본토 침공 시기를 1945년 가을로 예측했으며, 이는 연합군의 몰락 작전 일정과 거의 일치했다.
2. 1. 전황 악화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은 패배하였고, 1945년 1월 9일 미군이 루손 링가옌만에 상륙하면서 일본 본토 침공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일본군은 말레이반도, 인도차이나반도, 남양 군도, 중국 남부, 만주국 등에서 제해권과 제공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연합군 해군의 잠수함과 함재기의 공격으로 수송선과 호위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마리아나 해전과 레이테만 전투 이후,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타이완섬에 이르는 제해권과 제공권을 상실했고, 연합군의 징검다리 작전으로 보급선이 차단되어 물자 수송과 병력 증원이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동맹국인 나치 독일마저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소련의 대일 참전 또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2. 2. 일본의 대응
대본영은 1945년 1월 20일, "제국육해군 작전계획대강"을 결정하고 본토 결전 준비에 돌입했다.[1]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이 패배하면서, 쿠릴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난세이 제도 이남의 오키나와, 대만 등에서 연합군에게 최대한 저항하여 시간을 벌고, 그동안 일본 본토에서 결전을 치른다는 점감요격전략이 채택되었다.[1] 이 작전계획대강에서 '''텐고 작전'''도 동시에 입안되어 재가되었다.일본군은 연합군의 본토 침공 시기를 1945년 가을로 예측했으며, 이는 연합군의 몰락 작전 일정과 거의 일치했다.[1]
3. 준비
1945년 1월 22일, 일본 육군은 내지방위군 예하의 동부군, 중부군, 서부군을 폐지하고, 작전군과 군관구를 새로 편성했다. 작전 부대와 군정 부대를 분리하여 작전과 군정을 분리했다. 방위총사령부 방위사령관이 내지방위군을 지휘하고, 직할 부대로 제36군(도쿄 방위)과 제6항공군을 두었다.
새로 편성된 방면군과 군관구는 다음과 같다.
- 제11방면군·동북군관구 (도호쿠)
- 제12방면군·동부군관구 (간토·고신에쓰)
- 제13방면군·도카이군관구 (도카이·호쿠리쿠)
- 제15방면군·중부군관구 (간사이·주고쿠·시코쿠)
- 제16방면군·서부군관구 (규슈)
홋카이도, 한반도, 대만에서는 북부군, 조선군, 대만군이 해체되고 다음과 같이 재편되었다.
- 제5방면군·북부군관구 (홋카이도 지방)
- 제17방면군·조선군관구 (한반도)
- 제10방면군·대만군관구 (대만)
본토결전시 각 방면군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요격, 방위하는 것으로 결전 준비에 대한 "결전작전 준비요강"(決戦作戦準備要綱)을 시달했다.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상실했을 무렵 일본 육군의 총병력은 약 400만 명이었지만,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와 버마에서 북쪽으로는 한반도와 만주국에까지 일본의 영향권에 널리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본토에 주둔한 동부군, 중부군, 서부군을 다 합쳐도 약 45.6만 명으로 총병력의 약 11%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홋카이도, 쿠릴 열도, 사할린, 오가사와라, 난세이 같은 본토 주변부와 군학교 등 41.2만 명, 항공부대 선박부대 등의 인원 45.3만 명을 합쳐도 132.1만 명으로 총 병력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소위 '''송두리째 동원'''이라는 대규모 부대 신설 소집을 실시했다. 송두리째 동원은 크게 다음 3회에 나누어 실시되었다.
# 1945년 2월 28일 임시동원이 하령된 본토결전 제1차 병비
# 4월 2일-6일에 임시동원이 하령된 본토결전 제2차 병비
# 5월 23일 동원이 하령된 본토결전 제3차 병비
이렇게 긁어모아 일반사단 40개, 독립혼성여단 22개 등 150만 여명이 동원되었다. 물자가 제한되어 병력과 장비가 부족했지만 편성이 완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방침을 행했기에 이렇게 송두리째 동원된 사단들은 결국 어중간한 인원과 장비 상태로 배치되었다.
또 보조전력으로 방위소집에 따라 긴급동원한 특설경비대와 지구특설경비대도 준비되었다. 이런 부대들의 상황은 송두리째 동원 때 동원된 부대보다 더욱 열악했다.
해군은 육군의 조직 재편과 같은 시기에 해군총대사령부를 창설하여 연합함대, 각 진수부, 각 경비부를 포함한 해군 전 부대를 통합 지휘하게 하였다. 초대 해군 총사령장관은 도요타 소에무 대장, 그리고 그 후임으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되었다. 오자와 지사부로가 총사령관에 보직되자 남동방면함대와 남서방면함대가 해군총대에서 제외되었다. 두 방면함대의 사령관인 쿠사카 진이치 중장, 오오카와치 덴시치 중장이 오자와보다 선임이었기 때문이다.
연료 부족으로 전함과 항공모함이 충분히 가동될 수 없는 상태인데다 항공기 생산도 저하되고 있었기에 "본토방위"라는 전략목표를 위한 자살특공무기들을 정비했다. 1945년 7월 말 시점에 각종 자살돌격잠수함, 가이텐 등이 3천 척 이상 준비되었으며 9월 말까지 1천 대를 더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45년에는 기존의 병역법과 별도로 의용병역법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남자는 15세-60세, 여자는 17세-40세면 소집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노약자를 모아서 국민의용전투대를 편성할 계획이었다.
3. 1. 육군
1945년 1월 22일, 일본 육군은 내지방위군 예하의 동부군, 중부군, 서부군을 폐지하고, 작전군과 군관구를 새로 편성했다. 작전 부대와 군정 부대를 분리하여 작전과 군정을 분리했다. 방위총사령부 방위사령관이 내지방위군을 지휘하고, 직할 부대로 제36군(도쿄 방위)과 제6항공군을 두었다.새로 편성된 방면군과 군관구는 다음과 같다.
- 제11방면군·동북군관구 (도호쿠)
- 제12방면군·동부군관구 (간토·고신에쓰)
- 제13방면군·도카이군관구 (도카이·호쿠리쿠)
- 제15방면군·중부군관구 (간사이·주고쿠·시코쿠)
- 제16방면군·서부군관구 (규슈)
홋카이도, 한반도, 대만에서는 북부군, 조선군, 대만군이 해체되고 다음과 같이 재편되었다.
- 제5방면군·북부군관구 (홋카이도 지방)
- 제17방면군·조선군관구 (한반도)
- 제10방면군·대만군관구 (대만)
본토결전시 각 방면군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요격, 방위하는 것으로 결전 준비에 대한 "결전작전 준비요강"(決戦作戦準備要綱)을 시달했다.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상실했을 무렵 일본 육군의 총병력은 약 400만 명이었지만,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와 버마에서 북쪽으로는 한반도와 만주국에까지 일본의 영향권에 널리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본토에 주둔한 동부군, 중부군, 서부군을 다 합쳐도 약 45.6만 명으로 총병력의 약 11%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홋카이도, 쿠릴 열도, 사할린, 오가사와라, 난세이 같은 본토 주변부와 군학교 등 41.2만 명, 항공부대 선박부대 등의 인원 45.3만 명을 합쳐도 132.1만 명으로 총 병력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소위 '''송두리째 동원'''이라는 대규모 부대 신설 소집을 실시했다. 송두리째 동원은 크게 다음 3회에 나누어 실시되었다.
# 1945년 2월 28일 임시동원이 하령된 본토결전 제1차 병비
# 4월 2일-6일에 임시동원이 하령된 본토결전 제2차 병비
# 5월 23일 동원이 하령된 본토결전 제3차 병비
이렇게 긁어모아 일반사단 40개, 독립혼성여단 22개 등 150만 여명이 동원되었다. 물자가 제한되어 병력과 장비가 부족했지만 편성이 완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방침을 행했기에 이렇게 송두리째 동원된 사단들은 결국 어중간한 인원과 장비 상태로 배치되었다.
또 보조전력으로 방위소집에 따라 긴급동원한 특설경비대와 지구특설경비대도 준비되었다. 이런 부대들의 상황은 송두리째 동원 때 동원된 부대보다 더욱 열악했다.
해군은 육군의 조직 재편과 같은 시기에 해군총대사령부를 창설하여 연합함대, 각 진수부, 각 경비부를 포함한 해군 전 부대를 통합 지휘하게 하였다. 초대 해군 총사령장관은 도요타 소에무 대장, 그리고 그 후임으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되었다. 오자와 지사부로가 총사령관에 보직되자 남동방면함대와 남서방면함대가 해군총대에서 제외되었다. 두 방면함대의 사령관인 쿠사카 진이치 중장, 오오카와치 덴시치 중장이 오자와보다 선임이었기 때문이다.
연료 부족으로 전함과 항공모함이 충분히 가동될 수 없는 상태인데다 항공기 생산도 저하되고 있었기에 "본토방위"라는 전략목표를 위한 자살특공무기들을 정비했다. 1945년 7월 말 시점에 각종 자살돌격잠수함, 가이텐 등이 3천 척 이상 준비되었으며 9월 말까지 1천 대를 더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45년에는 기존의 병역법과 별도로 의용병역법이라는 것을 공포하여 남자는 15세-60세, 여자는 17세-40세면 소집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노약자를 모아서 국민의용전투대를 편성할 계획이었다.
3. 1. 1. 지휘 체계 재편
1945년 1월 22일, 일본 육군은 내지방위군 예하의 동부군, 중부군, 서부군을 폐지하고, 작전군과 군관구를 새로 편성했다. 작전 부대와 군정 부대를 분리하여 작전과 군정을 분리했다. 방위총사령부 방위사령관이 내지방위군을 지휘하고, 직할 부대로 제36군(도쿄 방위)과 제6항공군을 두었다.새로 편성된 방면군과 군관구는 다음과 같다.
- 제11방면군·동북군관구 (도호쿠)
- 제12방면군·동부군관구 (간토·고신에쓰)
- 제13방면군·도카이군관구 (도카이·호쿠리쿠)
- 제15방면군·중부군관구 (간사이·주고쿠·시코쿠)
- 제16방면군·서부군관구 (규슈)
홋카이도, 한반도, 대만에서는 북부군, 조선군, 대만군이 해체되고 다음과 같이 재편되었다.
- 제5방면군·북부군관구 (홋카이도·남사할린·쿠릴 열도)
- 제17방면군·조선군관구 (한반도)
- 제10방면군·대만군관구 (타이완)
1945년 4월 8일, 방위총사령부를 폐지하고 제1총군, 제2총군, 항공총군을 창설했다. 제1총군은 스즈카 산맥 동쪽(홋카이도·남사할린·쿠릴 열도 제외), 제2총군은 스즈카 산맥 서쪽, 항공총군은 전국 육군 항공 부대를 통일 지휘했다. 홋카이도·남사할린·쿠릴 열도 방위는 제5방면군이 계속 담당했다.
3. 1. 2. 작전 준비 기본 방침
육군의 작전 준비는 1945년 4월 8일 대본영 육군부가 발령한 '결호 작전 준비 요강'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작전은 결1호~7호로 구분되었으며, 쿠릴 열도 및 북부군관구 방면을 결1호, 도호쿠군관구 방면을 결2호, 동부군관구 방면을 결3호, 도카이군관구 방면을 결4호, 주부군관구 방면을 결5호, 서부군관구 방면을 결6호, 조선군관구 방면을 결7호로 했다. 담당 군은 결1호가 제5방면군, 결2~4호가 제1총군, 결5·6호가 제2총군, 결7호가 제17방면군으로 지정되었으며, 적 주력의 상륙이 예상된 결3호와 결6호의 준비를 중점적으로 실시하도록 했다.3. 1. 3. 부대 증강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상실했을 무렵 일본 육군의 총병력은 약 400만 명이었지만, 말레이 반도나 버마에서 한반도와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의 영향권에 널리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일본 본토에 있던 것은 동부, 중부, 서부의 각 군을 합쳐도 약 45만 6천 명으로, 총 병력의 11%에 불과하여 본토 결전을 수행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다. 홋카이도, 쿠릴 열도, 사할린, 오가사와라 제도, 남서 제도의 본토 주변부, 군사 학교 등의 약 41만 2천 명, 항공 부대, 선박 부대 등의 인원 약 45만 3천 명을 합쳐도 132만 1천 명으로, 총 병력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은 '''송두리째 동원'''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부대 신설과 소집을 실시했다. 송두리째 동원은 다음과 같이 크게 3차례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 1945년 2월 28일에 임시 동원이 하달된 '''제1차 병비'''
- 4월 2일과 6일에 걸쳐 임시 동원이 하달된 '''제2차 병비'''
- 5월 23일에 동원이 하달된 '''제3차 병비'''
이러한 동원을 통해 일반 사단 40개, 독립 혼성 여단 22개 등 약 150만 명 가까이가 동원되었다. 일본군은 침공 예상 시기를 염두에 두고 부대 편성을 실시했으나, 기간과 물자의 제한으로 인해 병력이나 장비가 부족하더라도 편성이 완료된 것으로 간주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사단은 결국 어중간한 인원과 장비 상태로 배치되었다.
또한, 보조적인 전력으로서, 방위 소집에 의해 긴급시에 동원하는 특설 경비대와 지구 특설 경비대도 준비되었다. 이들 부대의 장비 상황은 모두 징병 부대에 비해 더욱 열악했다.
3. 2. 해군
해군은 육군의 조직 재편과 같은 시기에 해군총대사령부를 창설하여 연합함대, 각 진수부, 각 경비부를 포함한 해군 전 부대를 통합 지휘하게 하였다.[2] 초대 해군 총사령장관은 도요타 소에무 대장이었고, 이후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되었다.[2] 오자와 지사부로가 총사령관에 보직되자 남동방면함대와 남서방면함대는 해군총대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는 두 방면함대 사령관인 쿠사카 진이치 중장과 오오카와치 덴시치 중장이 오자와보다 선임이었기 때문이다.[2]연료 부족으로 전함과 항공모함이 충분히 가동될 수 없는 상태인데다 항공기 생산도 저하되고 있었기에 "본토방위"라는 전략목표를 위한 자살특공무기들을 정비했다. 1945년 7월 말 시점에 각종 자살돌격잠수함, 가이텐 등이 3천 척 이상 준비되었으며 9월 말까지 1천 대를 더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3. 2. 1. 지휘 체계 재편
1945년 4월 25일, 해군총대사령부가 창설되어 연합함대, 각 진수부, 각 경비부를 포함한 해군 전 부대를 통합 지휘했다.[2] 초대 해군 총사령관은 도요타 소에무 대장이었고, 이후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되었다.[2] 오자와 지사부로가 총사령관에 보직되자 남동방면함대와 남서방면함대는 해군총대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는 두 방면함대 사령관인 구사카 미노루 중장과 오코치 덴시치 중장이 오자와보다 선임이었기 때문이다.[2]3. 2. 2. 특공 부대 배치
일본 해군은 특별 공격을 주력 공격 수단으로 삼고, 대량의 특공 병기 정비를 추진했다. 1945년 7월 말, 교룡 73척, 해룡 252척, 회천 119척, 진양 2850척(육군 700척 포함) 등이 준비되었으며, 9월 말까지 특수 특공기 약 1,000기 생산을 목표로 했다.[3] 이러한 특공 병기를 배치한 부대는 "돌격대"라고 불렸으며, 여러 돌격대를 묶어 특공 전대(제1~제8, 제10의 총 9개 전대)를 편성했다.3. 2. 3. 육상 및 방공 부대 확충
해군은 군항 및 요항 소재지에서의 육상 작전을 담당하기 위해 육상 전투 부대를 확충했다. 진수부·경비부에서는 복수의 특별 육전대로 연합 특별 육전대를 편성하고, 본토 요지에 경비대나 근거지대를 설치했다. 이러한 부대 중에는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이오지마 경비대나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오키나와 방면 근거지대처럼 육상에서의 전투에 참가하여 괴멸된 부대도 있었다.3. 3. 행정 및 민병 조직 정비
1945년, 군사적 요구와 국민의 권리 조정을 위해 '군사특별조치법'이 시행되어 선박, 항만 등의 일원적 운영과 지방 행정 조직의 전시 체제화가 시도되었다. 정규 육해군 부대 외에, 국민 전투 조직 구축을 위해 의용병역법이 1945년 6월 공포되었다.병역법과 별도로, 신법 '의용병역법'이 1945년 6월에 공포되어, 남자는 15세부터 60세(당시 남자의 평균 수명 46.9세), 여자는 17세부터 40세까지가 소집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원으로, 국민의용전투대를 조직할 계획이었다. 대상 연령 이외에도, 지원하면 전투대에 참가할 수 있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전투 예상 지역으로부터의 퇴피가 예정되어 있었다.
4. 기지 및 방어 진지 건설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전멸하고 오키나와가 연합군에 점령된 후, 본토 결전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남규슈의 가노야(해군), 지란(육군), 반세이(육군) 및 세토내해 도쿠야마 앞바다 오쓰시마(해군) 등의 특공 기지는 출격이 줄었으나, 본토 결전이 강조되면서 다시 중요시되었다. 또한, 발진 기지 확보를 위해 전국 각지에 은닉 비행장이 정비되어 연합군 상륙 저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본토 결전에 대비한 군 시설도 각지에 건설되었다. 방위 시설은 연합군 상륙 예상 지역 해안에 설치되었으며, 약 150만 명의 신편 부대가 동원되었다. 1944년 가을부터 시작된 대규모 방위 시설 건설은 지상 작전 진지, 항공 기지, 주정 기지, 후방 병참 시설, 교통 통신 시설 등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방어 진지는 강력한 방어 전투를 위해 수제(水際) 진지를 강화하고, 공습과 함포 사격에 견딜 수 있는 동굴식 지하 진지를 설치하는 방향으로 구축되었다. 주진지는 수제에서 적절히 후퇴한 장소에 설치되었으며, 중대, 대대, 연대급 병력과 화포, 기관총이 배치되었다. 우치노우라 임시 요새나 마쓰시로 대본영 등이 그 예이다.
5. 전술
일본군은 연합군 상륙 함대에 대해 특별 공격대를 중심으로 해상, 해중, 공중 공격을 계획했다. 함대를 지원하는 적 기동 부대에는 항공기 특별 공격대와 야간 뇌격 위주의 통상 공격대를 출격시켜 함대 호위를 방해하고, 세토 내해 주변에 잠복해 있던 잔존 구축함도 수상 특공대로 출격하여 야간에 적 함대 또는 수송 함대에 돌입, 포뢰전을 펼치도록 하였다. 상륙 부대를 태운 수송 함대에 대해서는 300km 이내로 접근한 시점에서 항공 공격을 가하고, 잔존 잠수함이나 특수 잠항정 등으로 전력을 깎은 뒤, 연안부 접근 시 가이텐, 신요에 의한 특공과 진지 포격 등 모든 수단으로 대항할 예정이었다.
상륙 부대에 대해서는 수제 결전 전술로 대응할 계획이었다. 적군이 해안에서 내륙부로 진격하는 것과 동시에 연안 배비 사단이 교두보로 역습을 시작하여 혼전 상태로 만들어, 적의 함포 사격이나 공습을 망설이게 하고, 그 틈을 타 내륙부의 기동 타격 사단을 투입하여 적을 격파하는 계획이었다. 제1선에서 미군의 맹공을 막는 연안 배비 사단은 4개 연대로 증강(내 1개는 반격 연대)되었다.
제12방면군 등에서는 이오지마 전투나 오키나와 전투와 같은 지구전이 아닌, 사이판 전투와 같은 결전 전술을 채택했다. 1945년 4월 대본영 육군부가 시달한 '국토 결전 교령'은 전군 특공 정신을 강조하는 공격적인 내용이었다.
적 항공기에 대해서는 요격기를 은닉하여 공습으로부터 방어하고, 보잉 B-29 등 대형 폭격기만을 집중 공격하는 방침이었다.
6. 전투 서열
6. 1. 육군
제5방면군은 쿠릴, 사할린, 홋카이도를 담당하는 결1호 작전을 수행했다. 스기야마 겐 원수가 이끄는 제1총군은 제11방면군(동북, 결2호 작전), 제12방면군(관동, 결3호 작전), 제13방면군(동해, 결4호 작전)을 지휘했다. 하타 슌로쿠 원수가 이끄는 제2총군은 제15방면군(긴키, 주고쿠, 시고쿠, 결5호 작전)과 제16방면군(규슈, 결6호 작전)을 지휘했다. 야마다 오토조 육군대장이 이끄는 관동군은 제1방면군, 제3방면군(만주), 제17방면군(조선, 결7호 작전)을 지휘했다.가와베 마사카즈 대장이 이끄는 항공총군은 제1항공군(동일본), 제6항공군(서일본), 제51항공사단, 제52항공사단, 제53항공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연합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곳은 결3호(관동)와 결6호(규슈)였으며, '결호 작전 준비 요강'에서도 "… 주전면은 태평양 및 동지나해 정면으로 하고, 전비의 중점을 관동 지방 및 규슈 지방에 둔다"라고 명시되어 관동과 규슈 두 방면에 중점이 두어졌다.
6. 2. 해군
해군 총사령장관은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해상호위 사령관을 겸임했으며, 초대 도요다 소에무 해군대장과 2대 오자와 지사부로 해군중장이 역임했다. 해군총대 직속부대로는 가이텐을 탑재한 수상함 부대인 해상정진부대(제31전대, 경순양함 키타카미, 구축함 나미카제)와 제101항공전대가 있었다.함대로는 제6함대, 제7함대, 제1호위함대가 있었다. 항공 부대로는 제3항공함대(스즈카 산 이동의 혼슈), 제5항공함대(스즈카 산 이서의 혼슈), 제12항공함대 등이 있었다.
주요 진수부로는 요코스카 진수부, 구레 진수부, 마이즈루 진수부, 사세보 진수부가 있었고, 경비부로는 오미나토 경비부, 오사카 경비부, 진해 경비부가 있었다. 연료 부족으로 원양 행동이 불가능해진 대형 함정은 특수경비함으로 분류되어 각 진수부에 정박했다. 여기에는 나가토(요코스카), 이세(구레), 휴가(구레), 하루나(구레)가 포함된다.
7. 총병력
7. 1. 지상 병력
결호 작전을 위해 일본 제국 육군은 53개 사단, 22개 혼성 독립 여단, 3개 경비 여단, 2개 전차 사단(전차 제1사단, 전차 제4사단), 7개 독립 전차 여단, 4개 고사 사단(고사 제1사단~고사 제4사단)을 포함한 대규모 지상 병력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제1총군(스기야마 하지메 원수 지휘), 제2총군(하타 슌로쿠 원수 지휘), 관동군(야마다 오토조 대장 지휘) 예하 부대로 구성되었다.7. 2. 항공 병력
결호 작전에 동원될 수 있는 일본 제국의 항공 병력은 약 10,000기로 추산된다.7. 3. 해상 병력
결호 작전에서 해상 병력은 전함 나가토, 항공모함 준요, 가쓰라기 등 4척, 중순양함 토네 등 2척, 경순양함 가시마 등 3척, 구축함 유키카제, 하쓰시모 등 40척, 잠수함 이-400, 이-401 등 41척, 특공정 신요 등 3800척, 각종 특수 잠항정 800척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중순양함 이상의 대형 함정은 연료 부족이나 대파, 착저 등으로 인해 작전 행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해군은 본토에서의 육상 결전을 상정했기에 적의 격멸을 꾀하지는 않았고, 본토에 내습할 연합군의 전력을 결손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7. 4. 인원
결호 작전에 동원된 인원은 육군 군인 및 군속 약 315만 명, 해군 군인 및 군속 약 150만 명이었다. 국민의용전투대 약 2800만 명이 동원될 예정이었다. 만주국군 약 15만 명도 동원되었다.참조
[1]
서적
本土決戦準備<1>関東防衛
朝雲新聞社
[2]
서적
戦史叢書93 大本営海軍部・聯合艦隊〈7〉―戦争最終期―
朝雲新聞社
[3]
서적
検証 大東亜戦争史 下巻
(출판사 정보 없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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